이미 끝난 싸움
2002년, 하버드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빈 서판(The Blank Slate)』을 출간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 상태이며 오직 환경과 교육에 의해 형성된다는 “빈 서판”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한 책이었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핑커는 “과학의 편"에서 “이데올로기의 편"을 물리친 영웅처럼 묘사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핑커가 쓰러뜨렸다는 그 적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죽어 있었다.
빈 서판의 학문적 근거였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1959년 노엄 촘스키가 스키너를 논파한 이후로 주류에서 밀려났다. 1970년대엔 인지혁명이 일어났고, 1990년대엔 행동유전학과 진화심리학이 자리 잡았다. 2002년에 “빈 서판은 틀렸다"고 선언하는 건, 냉전이 끝난 뒤에 반공 연설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학문적으로는 이미 승부가 난 싸움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죽은 적을 다시 꺼내서 쐈을까? 물론, 죽은 적은 반격하지 않으니 싸우기엔 편하다.
반복되는 패턴
이런 현상은 빈 서판 논쟁만의 특이 사례가 아니다. 학계 곳곳에서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정신분석학을 보자.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의 갈등, 라캉주의와 자아심리학의 대립은 20세기 중반까지 치열했다. 하지만 그 사이 인지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부상하면서 정신분석 자체가 주류 과학에서 밀려났다. 정신분석가들이 서로 “진짜 무의식"이 뭔지 싸우는 동안, 바깥에서는 fMRI로 뇌를 찍고 있었다.
문학이론도 마찬가지다. 1980-90년대에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신역사주의 사이의 논쟁이 인문학계를 뜨겁게 달궜다. “텍스트란 무엇인가”, “저자는 죽었는가” 같은 질문들이 학회를 지배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는 문학과 학과 정원이 줄고, 인문학 전공자 취업률이 바닥을 치던 때와 정확히 겹친다. 텍스트의 본질을 두고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사람들은 텍스트 자체를 읽지 않게 됐다.
거시경제학의 새케인즈주의 대 새고전학파 논쟁도 비슷하다. 수십 년간 “정부 개입이냐 시장이냐"를 두고 정교한 수학 모델로 싸웠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양쪽 모두 예측에 실패했다. “너희 논쟁이 현실과 무슨 상관이냐"는 냉소가 쏟아졌고, 이후 경제학의 관심은 미시적 인과추론과 행동경제학 쪽으로 이동했다.
공통점이 보인다. 외부적 영향력은 하락하는데 내부 논쟁은 격화되거나, 이미 끝난 논쟁을 다시 소환한다.
왜 죽은 적을 다시 세우는가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 관객을 위한 퍼포먼스다. 적이 강해 보여야 승리가 드라마틱하다. 핑커가 “빈 서판은 여전히 위험한 이데올로기"라고 경고할 때, 독자는 긴장하고 책을 산다. “사실 이 논쟁은 30년 전에 끝났어요"라고 말하면 누가 읽겠는가. 죽은 적을 좀비처럼 일으켜 세워야 콘텐츠가 된다. 게다가 죽은 적은 반격할 우려도 없다. 완벽한 상대다.
둘째, 자원 경쟁이다. 학자에게 관심은 곧 자원이다. 연구비, 학생, 교수직, 언론 노출—모든 게 관심에 달려 있다. 분야 전체가 쇠퇴할 때, 남은 파이를 차지하려면 “우리가 중요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 조용히 연구하면 아무도 안 보지만, “A 대 B 대논쟁"으로 포장하면 미디어도 다루고 초청 강연도 들어온다.
셋째, 틈새시장 공략이다. STEM이 과학의 실제 최전선을 차지한 상황에서, 일반 대중이 따라가기는 어렵다. 머신러닝 논문이나 유전체학의 기술적 세부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면 “인간 본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유전자의 노예인가” 같은 질문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정치적으로도 자극적이다. 대중이 소비하기 좋은 형태로 과학을 포장하려면, 이미 끝난 논쟁이라도 다시 꺼내는 게 효과적이다.
잔당이라는 알리바이
죽은 적을 다시 쏘는 행위가 정당화되려면, 적어도 “잔당이 남아있다"는 주장이 필요하다. 실제로 그런가?
핑커는 학계 밖에서 빈 서판적 전제가 여전히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아이는 동등한 잠재력을 갖는다”, “격차는 환경 탓이다” 같은 정서가 교육 정책과 정치 담론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건 학문적 주장이라기보다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학계 내에서 “인간은 완전한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연구자를 지목하라고 하면, 구체적인 이름이 잘 안 나온다.
여기서 잔당의 정의 문제가 생긴다. “강한 빈 서판"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유전적 차이를 강조하면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계하는 사람은 많다. 이걸 잔당으로 볼 것인가? 핑커 측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우리는 빈 서판을 주장한 적 없고, 단지 정치적 오용을 경계할 뿐"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잔당이 존재하는 것과 의미 있는 잔당인 것은 다르다.
지구 평평론을 생각해보자. 최근 몇 년간 지구 평평론자들이 유튜브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 화제가 됐다. 분명히 존재하고, 수도 적지 않고, 목소리도 크다. 커뮤니티도 있고 컨퍼런스도 연다. 그런데 이들의 존재가 “지구 구형론이 아직 논쟁 중"이라는 의미인가? 당연히 아니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지구 평평론을 진지하게 반박하는 500페이지짜리 책을 쓰고, “아직 평평론의 위협이 학계에 남아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학문적 논쟁이 아니다. 대중 교육이거나, 콘텐츠 비즈니스다. 잔당의 존재가 논쟁의 유효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빈 서판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SNS나 정치 담론에서 강한 환경론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빈 서판 논쟁이 학문적으로 아직 살아있다"는 근거가 되진 않는다. 트위터에서 진화심리학을 욕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학계에 빈 서판론자가 남아있다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의미 있는 잔당의 기준은 명확하다. 해당 분야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가? 주류 학회에서 진지하게 다뤄지는가? 대학 커리큘럼에 반영되는가? 이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의 “잔당"은 학문적으로 의미 없는 노이즈다.
그런데 죽은 적을 다시 쏘는 쪽은 이 구분을 의도적으로 흐린다. 대중적 노이즈를 학문적 위협인 것처럼 포장해야 자신의 작업이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쇠퇴하는 분야의 생존 전략
더 냉소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죽은 적과 싸우는 현상 자체가 해당 분야 쇠퇴의 증상일 수 있다.
진짜 활발한 분야는 미래를 향해 논쟁한다. 새로운 발견, 새로운 방법론, 새로운 질문을 두고 싸운다. 과거의 유령과 싸우지 않는다. 죽은 적을 꺼내야 할 만큼 살아있는 적이 없다는 건, 그 분야에 더 이상 흥미로운 논쟁거리가 없다는 뜻일 수 있다.
물리학자들이 “뉴턴 역학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를 노리진 않는다. 그들에겐 양자중력, 암흑물질, 다중우주처럼 아직 해결 안 된 진짜 문제가 있으니까. 반면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을 다시 꺼내서 드라마틱하게 포장해야 하는 분야는, 어쩌면 더 이상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쇠퇴는 개별 분야의 문제가 아니다. 더 큰 지형 변화의 일부다.
연구비는 공학과 생명과학에 집중된다. 학생들은 취업이 되는 전공을 선택한다. 미디어의 관심도 AI, 기후변화, 신약 개발 같은 주제로 쏠린다.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이론적 탐구, 사회 현상에 대한 거시적 해석—이런 것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빈 서판 대 과학"이나 “해체주의 대 전통” 같은 구도는 일종의 생존 전략일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중요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 관심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당신이 보는 논쟁은 진짜인가
다음에 어떤 분야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이 논쟁의 상대방은 아직 살아있는가? 학술지에 논문을 내고, 학회에서 발표하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실제 연구자들인가? 아니면 이미 죽은 이론을 좀비처럼 일으켜 세운 것인가?
잔당이 있다면, 의미 있는 잔당인가?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다뤄지는 입장인가, 아니면 SNS의 노이즈를 학문적 위협으로 포장한 것인가?
그리고 이 논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진짜 학문적 진보를 위해 싸우는 것인가, 아니면 상관없어지는 시대에 관심을 붙잡으려는 것인가?
죽은 적을 쏘는 총소리는 요란하다. 하지만 그 요란함이 때로는 살아있는 적의 부재를 감추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다만, 이 프레임을 100% 적용하기 전에 한 가지 유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남겨두는 입실론
강화학습에 입실론 그리디(ε-greedy)라는 전략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지금까지 알려진 최선의 선택을 하되, 작은 확률 ε만큼은 랜덤하게 탐색한다. 왜? 현재 최선이라고 믿는 게 진짜 최선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탐색을 완전히 멈추면 더 나은 답을 영영 발견하지 못한다.
이 글의 논지에도 입실론만큼의 유보가 필요하다.
모든 “죽은 적과의 싸움"을 관심 끌기용 퍼포먼스로 환원하면, 진짜 중요한 논쟁까지 냉소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STEM 바깥 분야가 “상관없어지고 있다"는 것도, 자본주의적 효용성 기준이 강화된 결과이지, 그 질문들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 인간 본성, 텍스트의 의미, 사회 구조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물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죽은 줄 알았던 적이 진짜로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 지적 역사에서 한때 폐기된 아이디어가 새로운 맥락에서 부활한 사례는 있다. 100% 확신으로 문을 닫아버리면, 그 가능성마저 차단된다.
그러니 이 글이 제시하는 프레임도, 95%의 경우에 적용하되 5%의 의심은 남겨두자. 입실론만큼은.
그래서 당신은 여기까지 읽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눈치챘을 수도 있다.
이 글 자체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학계의 좀비 논쟁"이라는 적을 세우고, 그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구도를 만들어서, 당신의 관심을 끌었다. 핑커가 빈 서판을 좀비로 소환했듯이, 나는 핑커를 좀비로 소환했다. 2002년에 나온 책을 2020년대에 다시 꺼내서 때리고 있다.
진짜 활발한 블로거는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지, 20년 된 대중서를 비판하며 메타적 통찰인 척하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관심 경제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은, 그것을 비판하는 글에서도 작동한다. 이 아이러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없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관심 경제의 시대에, 진짜 싸움과 퍼포먼스를 구분하는 눈이 필요하다. 이 글을 포함해서. 그래도『빈 서판』은 재밌으니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