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이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 그 재능이 이 아이의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생각하다 보니, 오랫동안 해오던 고찰을 다시 꺼내 정리하게 되었다. 재능과 노력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잔인한 구조에 대해.
노력의 가격
노력은 시간이라는 희소 자원을 요구한다. 그런데 재능이 있으면 같은 목표에 더 빠르게 도달한다. 적은 시간을 투입하고도 결과를 얻는 경험이 반복되면, 자연스럽게 “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했다"는 기준선이 형성된다.
재능이라는 축복이 “이 정도면 됐다"는 저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것을 고정 마인드셋의 함정이라 부른다. 재능에 의존하는 사람일수록 노력하는 모습 자체를 “재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결과가 즉시 나오지 않으면 경로를 이탈한다. 재능이 높을수록 이 함정에 빠질 확률도 높아진다.
그렇다면 왜 재능 있는 사람은 자신이 적게 투자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가. 그들에게는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같은 목표를 위해 얼마나 오래 버텨야 하는지를 관찰할 기회가 없다. 자신의 “두 달"이 타인의 “다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 두 달을 온전한 노력으로 기억한다.
기회주의자의 탄생
이 착각이 누적되면, 이상한 경험 데이터가 쌓인다: “나는 노력했지만 보상은 없었다.”
이 데이터가 임계치를 넘으면 노력이라는 행위 자체가 위험한 투자로 재분류된다. 보상이 불규칙하거나 부재할 때 행동은 소거된다. 재능 있는 사람의 경우, 실제로는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음에도 “투자했는데 실패했다"는 기억이 형성되어, 장기적 노력에 대한 동기가 소거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습된 무력감의 변종이다 — 실패를 학습한 것이 아니라,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믿음을 학습한 것.
그 결과, 이들은 단기 보상을 선호하는 기회주의자가 된다. 기회주의자는 파도를 기다린다. 간혹 운 좋게 파도를 잡으면, 그것을 자기 전략의 결과로 착각한다. 단기 성과에 취해 자신의 전략이 옳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국 큰 변동성 앞에서 패배한다.
위대함의 조건
모든 재능 있는 사람이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갈림길은 하나다: 장기간의 노력이 보상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했느냐, 하지 못했느냐.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수학에 재능이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학교 시험은 별다른 공부 없이 통과한다. 여기까지는 짧은 보상 주기의 영역이다. 그런데 수학 올림피아드에 도전하면서 처음으로 몇 달간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만난다. 이때 포기하면 기회주의자의 경로로 진입한다. 하지만 만약 그 몇 달을 버틴 끝에 문제를 풀어내는 경험을 한다면, “오래 버티면 결국 된다"는 믿음이 형성된다.
마태 효과가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한 번의 성공 경험이 다음 도전에 대한 자신감이 되고, 그 자신감이 더 긴 호흡의 투자를 가능하게 하며, 그것이 다시 보상으로 돌아오는 선순환. 재능과 노력에 대한 믿음을 모두 가진 사람은 이 선순환 안에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성공을 운에 맡기지 않으며, 패배하지 않는 구조를 직접 설계한다.
가장 잔인한 진실
그런데 문제는, 그 “첫 번째 성공 경험"을 얻는 것 자체가 운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옆에서 격려해주는 부모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함께 고민하는 동료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혹은 단지 그 시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본인의 의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조건들이다.
성실함이나 노력하려는 의지조차 부모의 양육 방식, 유전적 기질, 사회적 환경이라는 운에 의해 결정된다. 성공한 사람들이 “내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 때, 그 노력을 가능하게 한 조건 자체가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생략된다.
결국 “노력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일종의 재능이다. 그리고 이 재능은 다른 인지적 재능들과 마찬가지로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지원이 없어서가 아니다. 장기적 노력이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확신을 심어줄 환경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실패만 학습한 환경에서 노력은 위험한 도박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특이점 이후 — 규칙이 바뀐다
여기까지의 논의는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재능이란 인지적 능력이며, 노력이란 그 능력을 숙련하는 데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라는 전제. 그런데 AI가 특이점을 넘어서면, 이 전제 자체가 무너진다.
계산을 빨리 하는 아이가 “수학 재능이 있다"고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계산기가 등장한 뒤, 암산 능력은 더 이상 재능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AI는 이 현상을 인지 능력 전반으로 확장한다. 코딩, 글쓰기, 분석, 디자인 — 수년간의 숙련이 필요했던 모든 영역에서 AI가 평균 이상의 결과를 즉시 생성한다. 인지적 재능이 상품화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두 사람이 동일한 AI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이걸로 뭘 만들지?“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 불확실한 방향임에도 6개월간 밀고 나간다. 다른 한 사람은 이것저것 시도하다 일주일 만에 “별로네"라며 놓는다. 둘의 인지적 능력은 동일하다. AI가 실행을 담당하는 세상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코딩 실력이나 문장력이 아니라 기질이다.
AI 시대의 재능은 세 가지로 재정의된다.
질문하는 재능. 답을 내는 것은 AI의 영역이다.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무엇이 물어볼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남는다.
편집하는 재능. AI가 쏟아내는 수많은 결과물 중 무엇이 아름답고 가치 있는지 결정하는 심미안. 생성은 기계가 하지만, 선별은 인간이 한다.
거절하는 재능. AI가 제안하는 단기적 효율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기만의 방향을 고집하는 능력. 더 빠른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경로를 유지하는 힘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분모는 결국 하나다: 지루함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 과거에는 지능(IQ)이 계급을 결정했다면, AI 시대에는 이 능력이 새로운 계급 자본이 된다. 인지적 노력은 AI가 대신해주지만, 목적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고통은 오직 인간의 영역으로 남기 때문이다.
노력의 대상도 바뀐다. 과거의 노력은 하나의 기술을 반복 연습하여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매일 네 시간씩 치는 것. 코드를 수천 줄 작성하며 감을 익히는 것. 경로가 정해져 있었기에 “이만큼 하면 이만큼 는다"는 보상 주기를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AI 시대의 노력은 “어떤 문제가 풀 가치가 있는가"를 탐색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과정이다. 경로 자체가 불확실하므로 보상 주기는 더 길고, 더 불규칙해진다.
여기서 잔인한 역설이 발생한다. AI가 실행 비용을 0에 가깝게 낮추면, “시도"의 진입장벽이 극도로 낮아진다. 누구나 앱을 만들고, 글을 쓰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진입이 쉬워지면 보상에 대한 기대도 빨라진다. “AI로 하루 만에 만들었는데 왜 결과가 안 나오지?” 과거에는 재능 있는 소수만 겪던 “짧은 보상 주기 중독"이, AI 시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된다. 두 달이 아니라 이틀 만에 “노력했다"고 느끼는 시대가 온다.
결국 AI는 재능의 역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설을 민주화한다. 모든 사람이 재능 있는 사람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세상. 기회주의자는 파도를 기다리지만, 거목은 뿌리를 내린다. AI 시대의 파도는 너무 잦아서, 뿌리 없는 이들은 매일 표류하게 될 것이다.
끈기의 양극화가 시작된다. 경로가 맞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방향을 유지하는 힘 — 이것이 AI 시대에 유일하게 남는 재능이 될 수 있다.
결국 남는 질문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노력에 대한 믿음이 운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운을 인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 아닌가. 적절한 난이도에서 “해냈다"는 경험을 반복할 수 있는 구조, 보상 주기가 견딜 만한 수준으로 설계된 성장의 사다리. 그리고 AI 시대에는, 그 사다리의 형태마저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 숙련의 사다리가 아닌, 탐색과 방향 설정의 사다리로.
아들이 자라서 어떤 세상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다만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아이의 시계에 맞는 작은 성공을 설계해주는 일일 것이다. 거대한 보상을 기다리다 지치지 않도록,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도전과 그에 맞는 마이크로 보상을 배치하는 것. 그래서 “오래 버티면 결국 된다"는 믿음의 씨앗을 운이 아닌 의도로 심어주는 것.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재능이 아니라 “오래 버텨본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누군가가 설계해줄 수 있다.
참고문헌
- 캐럴 드웩, “마인드셋” (2006)
- 앤절라 더크워스, “그릿” (2016)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행운에 속지 마라” (2001)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