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전남 구례 출신이다. 집안에 빨치산 연루자가 있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오남매의 장남으로 가족을 부양하셨다.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보면 허물어져 가는 전통가옥이 남아 있었는데, 그곳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삶은 지금의 나로선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80년대 중동 건설 붐 당시, 아버지는 한신공영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잡부로 파견되셨다. 이렇다 할 기술이 없으셨으니까. 하지만 현지에서 1년 만에 측량 기술을 배워 측량기사가 되셨다. 측량기사가 되자 회사에서 차와 파키스탄인 조수 두 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나도 아내 직장 때문에 한동안 중동에서 머물러 본 적이 있다. 한낮에는 50도에 육박해서 도저히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에어컨이 나오는 거대한 몰에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힘들진 않았다. 내가 안락했던 건 아마 수많은 아버지들의 피와 땀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뺨에는 그 시절에 생긴 새끼손톱만 한 검은 반점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번 돈으로 한국에 돌아와 가게를 열고,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1990년, 아버지는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대우전자의 어린이용 컴퓨터 “코보"를 사주셨다. 단칸방 살이에 그게 가능했다는 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60만원.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흰색 본체에 키보드가 붙어 있었고, 동그란 프레임의 전용 모니터와 조이스틱이 세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MSX 호환 기종이었다. 키보드 윗면에 카트리지 슬롯이 있어서 게임팩을 꽂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는 종일 게임을 할 뿐이었다. 카트리지를 꽂지 않으면 파란 화면에 MSX BASIC이 떴다. 커서가 깜빡였다. 다섯 살짜리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10 PRINT "HELLO"를 치는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셨지만, 아들이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 되길 바라셨다.
몇 년 뒤, 아버지는 세진컴퓨터랜드에서 486 DX를 사셨다. 그리고 하이텔에서 ‘죽마고우’라는 동호회의 시삽을 맡고 계셨다. 모뎀으로 접속하던 PC통신 시절이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셨다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동호회를 운영하셨다는 건 단순한 이용자 수준은 아니었다.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그만큼 강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도 PC통신과 인터넷을 또래보다 일찍 접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버지는 전 재산을 털어 영어학원을 개원하셨다. 아버지는 영어를 못하셨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해외에서 원어민 강사를 직접 구해서 한국까지 데려오셨다. 번역기 프로그램 하나로. 1990년대 후반의 번역기라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악했을 것이다. 그걸로 외국인과 소통하고, 채용 조건을 협의하고, 실제로 한국까지 오게 만들었다. 도구가 완벽하지 않아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걸, 아버지는 몸으로 보여주셨다. 지금 내가 쓰는 rick이라는 이름은 그때 캐나다에서 처음 데려온 원어민 교사가 지어준 것이다.
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AWS 사용법을 공부하고 계셨다. 개발자들도 어려워하는 서비스를 60대 후반에 독학하셨다. 무엇을 만들려고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목적 같은 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냥 궁금하셨을 것이다. 평생 그래오셨으니까.
아버지의 바람대로라면 나는 지금 리누스 토발즈 정도는 됐어야 했을지 모르겠다. 현실은 적당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된 것에 그쳤다. 나이가 들어서야 아버지가 했던 일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완벽하지 않은 도구와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단 부딪혀 보시고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셨다. 생전에 그 존경을 보여드리지 못한 게 참 아쉽다.